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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손쓸 수도 없이 사라졌다.
아니, 지금의 나여도, 사라지게 해 주는 게 손을 쓰는 셈이겠지.

최근 우리 병원에 특별한 단골이 생겼다. 사람은 종종 달라지지만 경찰이라는 점이 공통점이다. 경찰병원은 아니거니와, 당연한 일이다.

그리 두려울 일도 없다. 수틀리면 얼른 약을 집어삼키면 된다.
이 병원의 본분을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만, 저 때문에 고생들 하시는데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독은 없지만 제가 맛을 몰라서 괜찮을 맛인진 모르겠군요.

OWN은 쓰러졌다. 그리고 2페이즈가 시작되었다.
2페이즈의 보스는 흰 가운을 입은 20대의 보라색 곱슬머리 여성이다. 주된 출몰지는 병원으로 주변 대상을 치유한다.


단순히 어머니나 주위의 기대 때문은 아니었다. 끌려서 걸어온 길이 아까워서만은 아니다. 네가 나에게 준 저주를, 내가 마저 지고 갈 뿐.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다들 학업이 바빠졌다.
나이트코드의 접속음은 드문드문해졌다. 다만 카나데만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가끔 세카이에서 카나데를 만나면,
...그 때 내가 많이 힘들었는지 나는 기억이 오락가락하다. 에나 말로는 카나데가 만날 때마다 송장이 되어 갔다고.
으레 그랬듯 밥 거르길 밥 먹듯 했나 보다. 내가 뭔 짓을 했길래 날 볼 때마다 구원해야 하는데, 같은 말을 중얼거리냐고 했다.

몇 달 만에 나이트코드에 알림음이 울린 어느 날.
드디어 널 구원할 곡을 만들었어, 마후유.
신곡 파일을 올리고 너는 온몸이 꺼져 버렸다.

그 곡에 나는 구속(救贖)받았다.
너도 사라지고 싶어했다. 하지만 나의 저주를 짊어지기로 했기에, 노래로 누군가를 구원하기 전까진 사라지지 못했다. 최소한 나를 구원하기 전까지는.
하지만 온 세상 저주를 십자가처럼 짊어지기엔, 네 몸은 햐얀 거품이 낀 얼음처럼 금세 녹아내렸다.
십자가를 지다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졌다. 내가 구원받을지 확인도 못한 채.
노래 자체는 사실 이전과 뭐가 달라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내가 뭘 할지는 깨달았다.

어릴 적 난 막연하게나마 간호사가 되겠다고 했다. 아플 때 엄마한테 상냥함을 받았으니까.
너도 나에게 비슷한 상냥함을 준 적이 있다.
이제 난 이해한다. 네가 내게 뭘 말하려 했는지.
그간에 네가 진 저주를 돌려받으러, 나는 십자가를 졌다.

나는 의사가 되겠다. 다만 이전처럼 좋은 아이라서는 아니다. 간호사나 의사나 너나, 아픈 사람을 구원하는 건 매한가지다.
너의 저주도 내가 받겠다. 너는 자신을 챙기기보다 구원에 매달렸다. 진정한 나는 먼저 깨닫지 않아도 좋아. 내 사명은 깨달았으니. 네 몫까지 아픈 사람들을 구원하겠다.
그렇게 나는 구속(拘束)되었다.

니고는 멤버 한 명이 빠져 우왕좌왕하던 차에 나도 의사가 되겠다고 하니 자연스레 해체되었다. 나는 모든 시간을 입시에 집중할 수 있게 되어 의사가 되는 데 성공했고, 에나와 미즈키도 각자 갈 길을 갔다.
가끔씩 세카이에서 만나긴 했지만, 요즘은 세카이에 차마 갈 수가 없다.
미쿠는 내 마음을 남에게 말하진 않지만 상당히 안쓰러워하는 모습을 자주 보인 모양이다. 내가 세카이에 오면 바로 심문 당할 테니.

지금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호스피스나 마찬가지다. 가망이 아예 없는 이들만 들어오는 건 아니나, 완치도 어렵고 치료 과정마저 고통스러운 큰 병을 앓는 환자가 대부분이다.
처음엔 살리려고만 했다.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저 병원의 방침을 따랐다.
가끔 살아나는 환자가 있으면 다들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감흥이 없었다. 기적에 한 번 매달리게 되면 대부분의 환자는 실패하는 만큼 절망할 테니까.

나는 어떻게 구원하겠다고 주사기를 들고 있는가.
살릴 수 없다면, 적어도 가는 길은 편하게 해줬으면.
허나 진통제를 마음대로 처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프로포폴 따위에 절여도 환자가 허우적대고 몸부림치는 건 매한가지다.
지금의 착한 아이로선 최선을 다해도 구원할 수 없다. 이제 놓아주고 싶다.

나는 사는 게 더 괴롭다는 환자들부터, 연명치료를 중단하기를 권했다. 정작 죽을 이보다 그 가족들이 더 격렬했다. 그들의 하늘은 무너지고, 나더러 잡고 으르렁대며 뜯어말렸다.
나의 엄마 같다. 나의 이웃들 같다.

어째서 희망을 고수하는 건가. 환자가 죽으면 가정이 무너질 테니까. 그 환자를 기둥삼으면 모두가 깔려 죽는다. 기둥이 무너지기 전에 집을 버리는 게 나을 텐데.
곧 햇빛이 들 거라는 말들에 환자는 눈빛이 꺼진다.

그들은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환자를 구원해 달라고 했다.
너희가 놓아줬다면 쉬웠을 것을.
나는 포기하지 않고 어려운 법을 찾아나섰다.

처음으로 발들인 불법. 어둠의 경로에서 안락사를 위한 약을 찾았다.
부검에도 걸리지 않는다는 약. 안정제를 연구하다 나온 만큼 안도감 속에서 죽는다는 약.
코난에나 나올 법한 약이 사실일지 믿음이 살짝 안 가지만 어디다 물어볼 수도 없으니 이대로 샀다.

나는 존엄사가 좌절된 환자를 다시 몰래 찾아가 약을 건네기로 밀약을 맺었다.
약을 복용한 환자는 그저 심장마비로 기록된다. 약이 사실이구나. 나는 안심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수행했다.
내게 범행을 숨길 정도의 치밀함은 충분했다. 사망자가 늘어나자 몇몇 사람은 의심했지만,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어 변한 점은 없었다.

환자들이 육체에서 해방될 때마다, 내 죄책감도 해방되가는 느낌이었다.
그들은 먼저 고통을 내려놓았다. 하나같이 나에게 '좋은 이'라고 했다. 어째서 '좋은 아이' 라 하는지는 몰라도, 부모님이나 동료들이 말하는 '좋은 이' 와 다르다는 건 알겠다.
'좋은 이'라, 이래서 사람을 저승으로 데려가는 건 악마가 아니라 천사인가.


노안의 남성이 병동에 왔다. 핼쓱한 인상이 죽기까지 얼마 안 남았던 너와 닮았다.

--

그가 병동에서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리자, 자신이 기억하는 이를 찾았다. 허나 이미 지나간 리무진. 그녀는 하얀 뼛가루가 된지 오래였다.

돌이켜보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입원했던 것 같다.
날 매번 찾아온 사람 중 간호사가 아니라, 아내를 닮은 백발의 소녀가 있었던가.
한 때 딸이 태어나면 이름을 카나데로 짓겠다고 그 소녀한테 말했다. 소녀의 이름도 카나데였다.
아내의 빈자리를 빛으로 채운 이가 있었다.
사람들을 만족시키고 싶었다. 내가 못하는 그 능력으로 나를 쓰러트린 이가 있었다.
그 때부터 자신이 쓰러질 때까지 나를 지킨 이가 있었다.
그 이가 다 한 사람, 카나데였다.

홀로 남아 늙어진 나만이 있다.
세상은 자신이 자는 사이에도 가속만 하였으리라.
차가운 컬러의 세상, 거울 속 자신만 세피아 색이었다.
피골은 작동도 못한 채 닳아, 다시 일어서기엔 너무 낡았다.

--

다 시들어가는 할미꽃 앞에서 나는 고백할 수 없었다.
카나데도 누군가를 구원하기 위해 쓰러졌다고 들었어.
그 누군가가 접니다.
하며 사죄해도 되는가.

사실 일부러 이 병원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 병원에 사는 게 더 나쁜 환자를 죽여 주는 누군가가 있다고.

그게 접니다.

소문이 사실이라 다행이구나.
그는 속삭였다.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니.
좋습니다. 새벽에 보지요.

새벽, 심청이 곶에 오른 듯 험험한 바람이 창문 너머 날아간다.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흰 달을 등지고 그늘이 드리운 백안이 보인다. 다소 헝클어진 저승색 머리, 낙엽을 묻은 눈밭같은 옷과 살. 인상 만으로도 죽음의 천사였다.

유언은 준비되었습니까.
재산관계 같은 건 이미 유서로 적어 두었다. 홀몸인 내겐 더 이상 들려줄 사람도 없고, 한 세월을 한탄해온 나는 할 말은 다 노래했어.

고백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해라.
카나데를 쓰러트린 건 접니다. 당신 딸은 결국 해냈네요. 저는 구원받아서 이 곳으로 왔습니다. 진실한 나를 찾는다는 제 소원은 아직이지만.

아버님은 묵언하였다. 화난 표정은 아니었다.
전 모두가 사라지고 싶어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렇고,
카나데도 당신이 쓰러지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누군가를 구원하기 전에는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 누군가에 나도 포함돼 있었겠지.

저도 모릅니다만, 정말이라면 저만 구원받는 건 카나데의 바램을 다 못 이룬 거겠죠.
저는 당신 딸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사라지기 전까진 고통에 잠긴 사람들을 구원해 왔습니다. 지금처럼요.
아버님께 심심한 사죄의 의미로, 당신을 구원하기 위해 드리는 선물입니다.

나는 노인의 손에 알약을 쥐어 주었다.
이 약을 복용한 사람들은 모두 고통을 호소하지 않았고, 안락하다고 하면서 영면하셨습니다. 부검에도 걸리지 않는 약이라 저에겐 문제가 없습니다.
복용 여부도, 복용 시각도 당신의 자유입니다.

다 죽어가는 사내는 약을 입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죽었다고 하면 아내가 뭐라고 하려나. 하며 가벼이 웃는다.
고맙네, 나도 구원해줘서.
그는 입을 벌리고 약을 받아들였다.
나는 병상에서 카나데의 아버지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내가 앓아누울 적 카나데가 잡아주었듯이.

내가 갈 곳이 아무도 없는 세상이라도 좋아. 적어도 아픔 없는 곳이라면 좋겠네. 나의 청춘은 꽃답게 피지도 못하고 시들었지만, 봄 공기 속으로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아. 둥실둥실 흔들리는 요람을 타고 꿈 속으로 가는 것 같네. 이런 꿈이라면 영원히 계속되어도 좋겠어.

그는 느긋이 잠들었다. 좋은 꿈을 꾸듯 옅은 미소를 띄었다. 마치 아산화질소(웃음 가스)에 둘러싸인 듯했다.
어느 시에 죽음은 용서보다 더 너그럽다고 했던가. 이번엔 나도 뭔가를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힘없이 잡혀 있던 손은 힘이 점점 빠졌다. 완전히 차가워지고서야, 마른 손을 데우고 있던 내 손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그는 심해에서 풀려났답니다.


경찰은 오늘도 소산 없이 돌아간다.
카나데의 아버지도 곧 여느 환자들처럼 장례될 것이다.
카나데의 묘는 카나데 어머니 묘 옆에 있다. 아버지도 이 옆에 와서 다시 옹기종기 모여 살겠지.

이렇게 보니 나는 카나데도 쓰러트리고, 그 아버님도 쓰러트리고, 요이사키 가를 끝내버린 무서운 여자다. 그 덕에 요이사키네는 드디어 다시 만났다. 요이사키 가도 그렇게 생각하리라.
의학적으로 저승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지만, 세카이도 있는 마당에. 만약 저승이 있다면 셋은 그곳이 어떤 세상이든 행복하리라.

카나데 아버지의 장례가 끝나면 성묘를 가자. 카나데의 묘 앞에서 나도 약을 먹을 것이다. 카나데의 무덤을 안고 잠들고 싶다.저승에서 요이사키랑 함께 지내지 않더라도 좋다.
이제 사라져도 좋을 만큼 누군가를 구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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