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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문학

돌아오는 5월, 백합이 질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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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지방에 따라 다르겠지만 벚꽃은 지고 백합은 필 때.
5월마다 지는 백합꽃이, 여기에 있다면 아시겠습니까.

사랑의 꽃봉오리들이 하나둘씩 미성숙하게 빼꼼하고 열릴 나이.
그 중에 그나마 노련한 백합이 교실에 흐드러졌다.
이성에 눈을 뜬다는 것을 깊게 배우기 전에 먼저 피어난 꽃.
그래서 순결한 이미지의 백합이라고 하는 것일까.


매화 잎 떨어지는 게 벚꽃잎 떨어지는 줄 알 때쯤 널 처음 만나 친해져 갔다.
같이 눈부신 햇살 아래서 놀며, 나도 모르는 새 쑥쑥 광합성을 하고 자라 봉오리가 생겼다. 

어느 날 살짝 열린 꽃잎의 틈새로, 문득 달라 보이는 너를 드디어 처음 보았다. 
그 땐 초등학교 고학년이었던 네 형광색 옷이 휘날리는 게 눈에 띄었다.
한련화 꽃잎을 두르고 마냥 웃는 너는, 눈부신 햇살을 반사해 나의 모든 광경을 사로잡았다.

너도 아직 봉오리여서 그럴까, 우리는 그게 사랑일까 하는 생각도 못 하고 여름을 보냈다.
옛날부터 애들이 다 그렇듯, 바다에서 물놀이하고,
저녁에 돌아갈 때쯤엔 집에서 어서 오라고 전화오는데 강변 따라 기타치면서 역으로 최대한 늦게 돌아가고 싶고.

잎이 질 쯤에야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때, 으레 여자라면 친구들끼리 그러듯 트리 보러 시내에 가자 했다.
벤치의 눈을 치우고 마주앉아,
네가 트리에 홀린 사이,

여길 사전탐방하며 미리 사 둔 반지를 몰래 꺼내 등 뒤에 숨기고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기,"
"뭔데, 유니?"
"너한테 줄 게 있는데..."
홍조인 척 수줍음을 누르고 반지를 보여주었다.
"짜자잔-!"
"야- 커플링이네?"
뭔가 커플링이란 말이 진짜 커플은 아니란 듯이 밝은데.

너는 반지를 끼고 나에게도 반지를 끼워주며,
"두 사람은 앞으로 영원한 베프가 되었음을 선서합니다!"

 

날 좋아하는 네 마음이, 내 마음의 전구를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동시에, "베프"라는 거리 차이가 온도차가 되어 전구에 금이 갔다.
그래, 아직은 내가 한발 더 나아가 있으니.

"저기...커플링이랬잖아."
"응! 그게 왜?"
"커플링은...연인끼리 하는 거잖아?"
"맞아! 근데 여자끼리라면 베프끼리지!"
"여자끼리지만...연인이 되고 싶어서 준 건데."

고백을 이렇게 할 줄이야!
최악인 건 둘째 치고 네가 뭐라고 답하지?

"하긴 서로 사랑하는 베프나 연인이나 똑같긴 하네!
음...근데 연인은 남자랑 여자랑 하는 거 말하는 건데..."

이미 여기서 결과가 망했어요 라고 느꼈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여기서 다음에 널 만날 때 나 혼자 어색해 하기도, 널 놓치기도 싫어서 빨리 꾀를 짜 봤다.

"그래도.. 아! 그럼 1년만 연애해 보자! 대신에 1년 지나면 다시 베프 하는 걸로. 연애했던 동안에 기억은 싹 리셋하고 지내도 되니까!

그 동안 나랑 연애해도 괜찮은 건지 아닌지 알고 결정해도 되잖아~ 응?"
게임 체험판처럼 1년만이라도 해보고 결정해 줘. 물론 게임회사는 1년 해보고 게임을 사길 바라고.

너는 그 고백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반복의 시작이었다.

그 후 1년, 우리는 친구로 돌아갔다. 연애한 적 없다는 듯 살았다.
하지만 이대로 아쉽다고 다시 1년만, 또 1년만.
처음엔 나만 그렇게 부탁했지만 어느 해엔 네가 먼저 부탁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매년 요맘때, 5월이면 1년을 마지막 사랑인 것처럼 연애하다 다음해 5월이면 헤어지고,
리셋하면 넌 날 처음 봤다고 하고,
다시 1년동안 첫사랑을 하고,
를 반복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올해의 러브 스토리도, 끝을 향해 달려가네.

두 사람의 붙어 있는 교복 치마 위에 벚꽃잎이 무덤 위 눈처럼 소복이 쌓여있다.
우리가 앉은 벤치까지 붉은 노을빛에 물들어가는데,
홍백색 잎은 지금까지도 계속 떨어지고 있다.
안녕, 이제 백합도 질 시간이야.
한련화를 밝히는 빛도 저물면, 난 보이지 않아서 영원한 어둠 속을 떠돌까.

"꽃잎 날리는 거 참 예쁘더라."
"맞아. 지는 것마저 아름다운 꽃이라.."
둘 다 우리가 오늘 진다고 말하진 않지만, 꺼내는 말마다 아쉬움이 가득했다.
시들어가는 꽃을 쥐듯, 고운 손결이 포개어짐을 느낀다.

"이렇게 손잡고 다니니까 하늘도 참 파랗던데 말야."
"파란 하늘만 보고 싶은 건 욕심인 걸까?"
너 없는 밤을 반복하는 게 아파서.
"그러면 좋겠지만 비도 와야 꽃이 피고 할 테니까."
"아...그냥 직접 말할게.
1년마다 헤어지고 또 만날 바엔 계속 사귀면 안 돼?"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래도 되겠지? 그러면 좋겠는데..
미안해.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번이 처음이잖아."
6년째의 처음이었다. 하지만 작년들과는 더 아쉬움이 담긴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뭐, 방황의 시기라고들 하지만.
네가 모르는 만큼, 나도 모르겠네.
언젠가 또다른 진짜 연애를 할지 모르니까!"
내가 기다려 준다고만 하기엔, 아직 확신이 없는 걸까.

불 꺼진 방, 너는 새끼 코알라처럼 이불 속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두근거려서, 그만 흐흐 하고 작은 웃음을 지었다.
너는 부끄러워졌는지 눈을 감는다.
너를 지그시 바라보다,
"잘 자."
하고 언제나처럼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이제 난 진다. 잘 있거라.

내일이면 둘 다 아무 말 없이 집을 나서서 학교로 가겠지.
어제까지의 네게 나는 없을 거다. 그 백합은 눈처럼 녹아버렸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진정한 사랑을 찾아낸다면,
내가 없던 나날들은 어땠는지, 얘기해줘.

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 뒤로도,
너와의 추억을 영원히 지고 1년을 반복하겠지.
언젠가, 너랑 진짜 연애를 하고 싶으니까.
내가 그렇게 될 수 있을 때까지.

 "내일 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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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지는 백합꽃> 듣다가 백합에 너무 목이 말라서 써 봤습니다.
한여름님 가사들은 다 스토리가 좋은데
거기에 백합이라니!! 백합이라니!!
이런 말 많은 주제를 꺼내드시면 어떡합니까
제가 할 말이 너무 많아지잖아요
다음에도 이런 말 실컷 하게 해주십시오..